항상 그 사람은 밝았다. 힘든 일이 있어도 어떤 사람 앞에서 힘들다는 내색 한 번 내지않던 그 사람은 유일한 한 사람에게만은 자신의 힘듦을 털어놓기도 했다. 분명 그건 그 사람을 정말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겠지. 또한 과장된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미소지으면 몇몇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에 비치는 햇빛만큼이나 과할 정도로 빛이 나는 밝은 미소이니 그 사람이 웃으면 주변 사람들마저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한 사람에 대해 과할 정도의 칭찬 표현을 해보이는 건 카무이도 처음이다. 자신의 피가 아닌 다른 사람의 피로 가득 물들어버린, 질척이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얕아보이는 웅덩이는 심오할 정도로 깊었다. 그 속 안에서 피에 가득 파묻히던 카무이를 구원한 건 그 사람, 나츠무였다.
염색을 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푸른 하늘과 유사한 색을 가진 살짝 웨이브진 단발머리. 저 깊은 광산 속에서 캐놓은 자수정만큼이나 보랏빛이 강렬한 자안. 겉으로는 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매이기에 비록 차가워보일수도 있지만, 그 단점이 가려질 정도로 화사한 미소가 나츠무의 모습을 따뜻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런 사람이 예고도 없이 카무이를 찾아왔고, 예고도 없이 카무이의 마음에 몰래 들어와 그 마음을 점점 키워냈다. 그리고는 결국 카무이는 이제 자신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감정, ‘사랑’이라는 피워냈다. 서로 다른 별의 인간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것마저 없앨 수 있는 마법을 지녔다. 물론 둘은 이 사랑이 첫 번째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 자부하면서까지 말이다.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둘은 헤어졌다.
그 헤어짐이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이 아닌 갑작스런 나츠무의 죽음이 원인이었다. 카무이는 이 사실을 기피했다. 왜냐하면 나츠무가 절대 죽을 일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분명, 카무이 곁에서 환한 미소로 자신이 가려는 피투성이의 길을 유일하게 비춰주던 사람이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큰 칼이 상체를 뚫어보이며 창백하게 누워있었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카무이와 어울리지않을 정도로 카무이의 손을 달달 떨렸으며, 이미 숨이 멎어있는 그 사람을 껴안아보여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단순 카무이의 온기를 나츠무가 빼앗을 뿐이었다. 나츠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카무이는 나츠무와 만나기 전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싸움에 미친 사람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카무이 옆을 항상 지켜보이던 부단장인 아부토는 카무이의 모습을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겉으로는 자신 옆을 지키던 사람이 죽어도 개의치않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약해지는 마음을 피가 솓구치는 전쟁터에서 숨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늘 일상처럼 다가오는 전쟁터 안에서 오늘도 살아돌아온 카무이는 피가 묻은 얼굴을 서슴없이 자신의 소매로 쓱- 하고 닦아보였다. 익숙하게 함선 안에 들어오며 카무이를 뒤따라 들어오는 아부토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굳게 다물고있던 입을 자연스레 열어보였다.
“단장,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어뗘?”
아부토의 말에 카무이를 움직이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워보이더니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밝은 목소리로 아부토의 말을 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아부토? 솔직하게 털어놓다니-”
“그야-… 아가씨가 죽은 이후로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카무이는 아부토의 질문에 침묵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대답조차 아깝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부토는 바라보는 카무이의 뒷모습에서 카무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있는지 눈치챈 것이었다.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아부토가 아닌 카무이였다.
“내가 곁에 둔 사람 한 명 죽었다고 이리 쉽게 넘어지는 사람처럼 보여?”
“하아-… 그게 그 말이 아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 단장의 모습. 위태위태해보인단말이지. 며칠 동안은 내가 일 좀 맡을게. 그러니깐-”
“아부토.”
“거참- 늙어버린 아저씨 귀찮게 하지말고 제대로 정신 좀 차리고 오라고, 단장. 아가씨가 그 모습을 보면 퍽이나 편히 쉬겠어?”
아부토는 뒤를 돌아보이며 자신이 걸어왔던 복도를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몸을 돌리면서 동시에 카무이의 우산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부토는 카무이의 우산을 쳐다보고는 ‘역시나 그렇지. 그렇게나 좋아했던 사람을 쉽사리 잊어버리겠어.’ 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벅벅 긁어보였다.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에 카무이는 살짝 비틀거리며 복도 벽에 머리와 몸을 기대며 피로 물든 우산의 손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직 피가 묻지않은 새하얀 소매로 무언가를 박박 닦아내보였다. 그렇게 박박 닦아내보인 자그마한 플라스틱 토끼 모형 열쇠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현재 카무이의 분위기와는 절대 맞지않는 액세서리였다. 그야 이 토끼 모형 열쇠고리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않는 나츠무가 사다 준 열쇠고리이니 말이다.
나츠무는 카무이가 ‘야토’ 즉, 밤의 토끼라는 별명을 지닌 종족이라며 카무이 생각을 하니 토끼가 생각나서 사왔다면 자신에게 선물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나츠무는 자연스럽게 카무이의 우산 손잡이에 달아줘보였다. 그런 새하얀 토끼 열쇠고리가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카무이는 새하얀 소매로 다시 한 번 새하얗게 만들어보였다. 새하얀 토끼 열쇠고리를 볼 때마다 카무이는 나츠무를 떠올렸고, 열쇠고리가 움직일 때마다 나츠무의 미소가 아른거렸다. 카무이는 절대 놓지않겠다는 마음으로 열쇠고리를 한 손에 꽉 쥐어잡은 채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살며시 감았다.
카무이가 눈을 뜨니 함선 안에 배치되어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 곳에 옮겨놓은 것인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며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기분을 느꼈다. 카무이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우산을 제일 먼저 찾아보였다. 마치 우산을 애지중지 아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우산에 달려있는 토끼 열쇠고리를 아낀다고 봐야했다. 다행히 침대 옆에 가지런히 세워진 우산은 새하얀 토끼 열쇠고리가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를 나타냈다. 카무이는 우산을 들어보인 채 자신을 방을 나섰다. 익숙하게 자신이 일하는 방으로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가니 엄청난 서류 안에서 머리를 쥐어보인 채 서류를 정리는 아부토가 제일 먼저 카무이 눈에 들어왔다. 카무이는 어제 아부토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며, 아부토에게 짤막한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원래의 카무이라면 절대 고맙다는 말은 절대 하지않겠지만, 위태위태한 모습에 나츠무가 퍽이나 편히 쉬겠냐며 카무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콕 건드렸다. 그 덕분에 조금은 기운을 차렸으니 나츠무의 방식대로 상대방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전해야겠다고 카무이는 생각했을 뿐이다.
“아부토.”
“단장!! 제발-… 나한테 서류 다 맡겨놓고 빈둥빈둥 놀지만 말라고.”
“하? 어제랑 말이 다르다, 아부토? 어제는 자기가 일을 다 맡아보이겠다고 나보고 쉬라고 했잖아.”
“하아!? 내가 언제!? 이 아저씨… 골병 들어서 죽기 전에 제발 단장이 맡아야 할 일은 단장이 좀 해.”
카무이는 당황스러웠다. 어제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으로 자신을 반기는 아부토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아부토가 건내는 서류를 바라보며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카무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부토.”
“무슨 일인데, 단장?”
아부토는 카무이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밀려있는 서류 더미를 빠르게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카무이조차 그런 아부토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이 뒤이어 말을 꺼내보였다.
“오늘 몇 일이야…?”
“그거야 당연히- X월 X일이지.”
카무이는 묘한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 구석에 내팽겨쳐져있는 달력을 잽싸게 잡아보이며 달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1년 반이나 차이나는 년도와 다른 날짜였다. 그것도 나츠무가 죽기 전, 아니 오히려 나츠무를 만나기 전의 년도와 날짜이니 카무이는 등 뒤에서 올라오는 소름에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아부토는 그런 카무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어제 막 먹어대서 정신이 이상해진건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카무이는 그런 아부토의 표정에 개의치않은 모습으로 입을 다시 한 번 열어보였다.
“아부토. 배 돌려.”
“엉? 어디로?”
“지구.”
“아?! 완전 반대방향이걸랑?!
“잔말말고 얼른 돌려. 확인해야될 게 있어. 지금 당장.”
카무이의 강압적인 말에 아부토는 귀찮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을 나서며 무전기로 배를 돌리라는 명령과 함께 가득 한숨을 내뱉었다. 카무이의 재촉에 2일이나 걸릴만한 거리를 하루만에 도착해보였다. 지구에 도착함과 동시에 카무이는 우산을 펴보이며 함선 밖으로 잽싸게 뛰어나갔다. 지독하게도 하늘은 너무나도 맑았다. 하지만 이런 날씨를 카무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분명히 목적지도 없이 유유자적하게 걷고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신이 있다면,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속으로 빌어보였다. 카무이는 몇 번이나 익숙하게 왔던 길을 헤쳐지나가며 가만히 우뚝 서보였다. 카무이의 체력 상 절대 지치지는 않지만, 긴장했던 것인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동안 꿈과 사진을 통해서 보기만 했던 그 인물이 자신의 앞에서 살아 움직이고있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염색을 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푸른 하늘과 유사한 색을 가진 머리색. 깊은 광산 속에서 캐놓은 자수정만큼이나 보랏빛이 강렬한 자안. 겉으로는 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매가 비록 차가워보이지만, 그 단점이 가려질 정도로 환하고 다정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쉽사리 녹여버리느 화사한 미소를 가진 한 사람. 카무이가 알고있는 단 한 사람, 나츠무였다.
그리도 보고싶었던 사람을 다시 보게되었다. 그것도 멀쩡한 모습과 동시에 환한 미소를 여전히 지닌 채 말이다. 안도감과 동시에 나츠무에게 다가가려보이자, 카무이는 멈칫하고 몸을 멈춰세웠다. 자신이 다가가지 않으면 나츠무가 죽을 일이 없다는 것을 카무이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나츠무가 목숨을 빼앗긴 것이라고. 나츠무의 세상에 ‘카무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나츠무는 카무이를 모른 채 이 지구의 사람들과 똑 같은 평범한 생활을 즐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동시에 나츠무를 만났으니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만나지도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분명 믿지도 않는 신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다시 한 번 나츠무와 행복하게 지내는 거 어때? 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카무이는 나츠무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 대신 나츠무가 자신을 모른 채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딱 한 번, 가까이서 보고 떠나자… 그게 최선이야…”
카무이는 쏟아져내려오는 강한 햇빛을 우산으로 막아보이며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나츠무 옆을 가만히 지나쳐갔다. 지나쳐가며 카무이의 눈에는 슬로우 모션이 펼쳐졌다. 항상 자신의 곁에서 웃어주던 환한 미소가 미련없이 휙- 하고 옆을 지나갔으니 말이다. 카무이는 그 미소를 힐끗 쳐다보며 ‘그래, 이거면 된거야. 나츠무가 죽지않으면… 나도 해피엔딩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미련없이 함선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찰나, 누군가가 카무이의 손목을 확- 하고 잡아보였다. 카무이는 갑자기 잡힌 손목에 짜증이 아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카무이는 아무런 표정이 없던 얼굴이 천천히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옆을 지나쳐간 나츠무가 카무이의 손목을 낚아챘으니 말이다. 카무이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츠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츠무는 잡았던 손목을 놓아보이며 무언가를 쥐고있던 반대쪽 손을 카무이에게 건내보였다.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상냥한 말투와 함께 작은 미소로 카무이를 향해 보여주며 카무이는 자신의 손에 놓인 물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츠무가 선물해준 토끼 열쇠고리였다. 이건 분명, 우산의 손잡이에 달려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그런데 왜 이 열쇠고리가 나츠무에게? 카무이는 우산의 손잡이를 향해 시선을 옮기자 우산 손잡이에 열쇠고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열쇠고리를 나츠무가 주워 카무이에게 건내준 것이었다. 카무이는 그 열쇠고리르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나에게 미래를 바꾸라는 계시가 아닐까. 믿지도 않는 신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라며 이런 일이 벌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어떻게 너를 벗어날 수 있겠어…”
카무이의 중얼거림에 나츠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무이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소중한 물건인데. 보답으로… ”
카무이는 돌려낸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나츠무의 세계 속에 자신을 끼어넣기로 결심했다. 맞물리지않은 시계의 톱니바퀴여도 억지로 끼워맞추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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