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뭔데… 그게 나보다 더 중요해…?”
처음으로 본 얼굴이다. 분노로 가득 차보이는 말과 함께 한글자, 한글자에는 떨림이 가득했다. 분노로 가득한 말과 다르게 소녀의 표정을 마치 화가 난 것이 아닌 슬픔으로 가득했다. 소년은 푸르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상태로 소녀를 가만히 바라 볼 뿐이었다. 소녀의 저런 반응은 소녀와 함께 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처음보는 반응이었으니 말이다. 소년은 어떻게 반응 해야할지 전혀 모른다. 오히려 저런 반응에 머리가 복잡해지기는커녕, 그 동안의 자신이 해왔던 일들에 대한 잘못을 서서히 뉘우치고 있었다. 소년에게, 소녀에게 길지않은 듯, 길었던 두 달이라는 시간 사이에 일어난 뒤틀려진 감정과 오해였다.
“아… 응응, 그렇구나-… 이번에도 못 온다는거지?... 어? 아냐아냐! 카무이는 바쁘니깐- 이해 할 수 있는걸-. 응-…”
나츠무는 짧았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조금은 길어진 것인지 머리카락의 끝 부분을 잡아 만지작거렸다. 남은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꼭 쥐어잡았고 그 사이로 아쉬움이 가득한 말을 들려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않는, 오직 상대방인 나츠무에게만 들리는 말에 전화기 사이로 나츠무는 똑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보였다. 목소리로는 전혀 심심치 않게 밝은 목소리를 건내보였다. 하지만, 밝은 목소리와는 나츠무의 얼굴을 정 반대로였다. 나츠무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껏 드리워졌으니 말이다.
“카무이 바쁘지…? 이만 끊을게. 응, 나중에 또 연락해-…”
탁-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자마마, 나츠무는 몇 초 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는 한 발자국 뒤로 움직이더니 그대로 벽에 등이 턱, 하고 부딪히면서 미끄러지듯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여전히 나츠무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껏 드리워진 상태였다. 항상 밝게만 웃고 다니던 나츠무의 얼굴이 이리 변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까의 전화가 원인이다. 자신의 애인인 카무이가 제독이 되고나서부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나츠무와 카무이가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지는 거의 2달이라는 시간이 넘어갔다. 보지 못하는 만큼 카무이는 나츠무에게, 나츠무는 카무이에게 근근히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서로가 어떻게 지내고있는지에 대한 근황까지 설명을 해줄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날짜를 잡아놓았다.
하지만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오기 3~4일 전, 카무이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 만나러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바쁜 사람이니 나츠무는 웃어보이며 괜찮다며- 아쉬움 가득한 말과 함께 약속을 취소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으면 되니깐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다음의 약속을 잡아도 바빠진 카무이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약속을 취소할 뿐이었다. 그게 수차례 반복되고 오늘도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 찾아왔다. 나츠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쭈그려앉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카무이는 나츠무를 좋아하지 않기 시작해서, 만나기 싫어졌기에 일부로 약속을 취소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여러 번, 약속을 취소하면 지친 나츠무가 먼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생각들이 머릿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를 잔뜩 어지럽혔다. 그와 동시에, 따르릉- 하고 울리는 전화소리에 천천히 일어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나츠무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츠무는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알겠다는 말과 함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바라보자, 꽤나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하지만, 만날 약속도 없었기에 나츠무는 겉옷 한 벌 챙겨입고는 환하게 켜져있던 전등을 꺼보였다. 환한 빛이 가득했던 집 안에는 어느새 깜깜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나츠무는 그런 집안을 무시한 채 차가운 쇠문고리를 그대로 잡아 돌렸다. 차가운 가을 바람이 얼굴을 긁어냈다. 그대로 나츠무는 익숙하게 열쇠로 문을 잠가보이고는 어디론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인상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는 책상을 두들기는 사람의 심기는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 가득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소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히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 훤히 보였다.
“단장, 좀 참지그래?”
소년의 옆에 한숨을 쉬어보이는 한 남성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손에 쥔 프린트 자료들을 그대로 소년 앞에 넘겨보였다. 그런 남성의 말과 함게 단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있는 것인지 단장이라 불리우는 소년은 아까와는 다르게 좀 더 인상을 찌푸리며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어보였다.
“아부토 같으면 참을 수 있겠어? 두 달. 나츠무를 못 본지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카무이는 자신의 두 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피곤과 짜증이 가득한 태도를 보였다. 아부토는 그런 카무이의 마음을 알고있지만, 지금 카무이와 아부토 앞에 잔뜩 놓인 서류들과 카무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알고있다만- 이 일을 처리해야만 진짜 갈 수 있다니깐.”
“아부토, 그 말 한번만 더 꺼내면 그때는-”
“하아… 알겠어, 알겠어. 내가 졌다-”
아부토는 카무이와 자신 앞에 놓여진 서류가 줄어드는 것보다, 이 함선의 단원의 목숨이 줄어드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포기했다는 듯 아부토는 주머니 안에서 두꺼운 무전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무전기를 켜보이더니, 체념한 듯 항해실에 조용히 말을 건내보였다.
“하아…지구로 가. 더 냅두다가는 우리가 먼저 죽게 생겼어.”
“알겠습니다.”
짧고 단호한 대답이다. 하지만, 아부토의 말을 다 이해한 듯이 항해실은 급하게 지구로 가는 항로를 설정해두기 시작했다. 카무이는 ‘지구’ 라는 짧은 단어였지만, 이렇게나 기쁜 건 처음이다. 이번에도 만날 수 없다며, 나츠무와의 약속을 취소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지구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츠무에게 서프라이즈라도 해줄까- 라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사람 수 십명을 죽일 것 같은 표정이 금새 풀어졌다.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던 카무이를 보던 아부토는 미간을 짚으며 카무이 책상에 있던 서류들을 들어 자신의 책상에 갖다놓기 시작했다. 이미 저렇게 들떠버렸으니, 서류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게 뻔했다. 몇 시간 후, 이미 12시가 지난 늦은 밤이 되어버렸다. 카무이에게는 이 시간이야말로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대였다.
하지만, 나츠무는 이미 자고있을 시간이었기에 나츠무가 일하는 편의점이 아닌 나츠무의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나츠무가 일하는 편의점을 지나는 순간, 익숙한 얼굴을 본 것. 익숙한 얼굴은 한 번 보면 전혀 잊혀지지않는 자신의 애인의 얼굴이었다. 카무이는 눈을 동그랗게 드며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무리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해도 시간은 정오가 지난 새벽 시간이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알바를 하는 나츠무는 항상 자신에게 늦은 시간까지 알바를 하게되었다고 알려주었다. 혹시라 있을 위험한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항상 그렇게 말을 건내주던 나츠무가 자신에게 새벽에 알바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먼지 한 톨 만큼이나 이야기를 들려준 적도 해준 적도 없다. 카무이는 무언가 찝찝한 마음과 함께 편의점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였다.
정오가 지난 이 시간에 알바를 하는 건 나츠무가 아니었다. 나츠무는 가끔가다가 파트 타임을 바꿔주거나, 그 날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한 알바생 대신 몇 번 정도 새벽 타임에 자리를 맡아주는 것 뿐이었다. 나츠무에게는 그닥 불만 같은 건 없었다. 나츠무는 꽤 오랫동안 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왔고, 그만큼 나츠무에 대해 잘 알고있는 점장님은 나츠무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나츠무가 퇴근할 때가 되면 푸딩 몇 개를 쥐어주거나 보너스를 두둑히 주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카무이가 편의점 알바를 그만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을 때도 나츠무는 거절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이 무척이나 즐거우니깐 말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점장님에게 급한 일이 생겨 자리를 채워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 필요한 사람이 나츠무였다. 나츠무는 거절의 한 마디도 없이 겉옷을 입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꿀꿀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해서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츠무는 외로이 새벽 알바를 보내던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면서 나츠무는 문을 보며 인사를 건냈다.
“어서오…”
나츠무는 편의점 안으로 조용히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이 멈췄다. 자신과의 약속을 취소했던 카무이가 지금 자신이 일하고있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왜, 카무이가 여기있는거지? 나츠무 자신이 꿈을 꾸고있는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나츠무는 자신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하지만, 꼬집었던 볼에는 통증만 남을 뿐 꿈 같은 건 전혀 깨지않았다. 일이 많아 오지 못한다고 했던 사람이 왜 자신 앞에 있는지 모든 것이 의문 가득했다. 나츠무는 놀란 상태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려했지만, 그 타이밍에 급한 일을 끝내고 온 점장님이 들어와 어색한 이 분위기를 깨뜨렸다.
점장님과 짧은 인사를 나눈 나츠무는 다시 한 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였다. 아까만해도 편의점 안에 서있던 카무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나츠무는 찝찝한 마음과 함께 입고있던 유니폼을 조심히 정리했다. 점장님은 나츠무에게 급한 게 불러내어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수고했다며 나츠무가 좋아하는 푸딩 2개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렇게 나츠무는 늦은 시간 새벽 알바를 짧게나마 끝내었다. 아까 보았던 카무이의 모습에 나츠무는 여전히 찝찝한 마음을 지닌 채 편의점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편의점 문 바깥에서 조용히 기다리고있는 카무이가 보였다. 분명 나츠무가 알바를 끝낼 동안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인지 가만히 서있었다. 그제서야 나츠무는 자신 앞에 보이는 카무이가 진짜 카무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츠무.”
나츠무가 먼저 입을 떼기 전에, 카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무이의 목소리에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니, 나츠무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푸딩을 든 비닐봉지를 꽉 쥐어잡았다. 그러자, 카무이는 미소도 없이 조용히 말을 이어보일 뿐이었다.
“알바… 늦게까지 했네.”
“응…”
“늦게까지 한다고 왜 말 안했어…?”
“말해봤자…”
나츠무는 조용히 뒷 말 끝을 흐렸다. 카무이는 나츠무의 말을 기다리는 듯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떨리는 목소리로 나츠무는 천천히 말을 이어붙였다.
“말해봤자… 카무이는 바쁘니깐..”
그 말에 카무이는 아무런 말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 나츠무의 말에는 거짓말 한 톨 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카무이 자신이 바쁜 나머지 자신의 애인인 나츠무에 대해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며,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길고 긴 침묵 사이에 차가운 바람을 불어왔다. 카무이는 나츠무를 바라보지 못하는 듯 시선을 아래로 숙였다. 나츠무는 쥐고있던 비닐봉지를 다시 한 번 고쳐잡으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조용한 침묵 속 안에서 카무이 쪽에서 띠링- 하는 벨 소리가 들렸다. 카무이는 쳇- 하는 혓 차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에 있던 전화기를 들어보였다. 그러고는, 곤란한 표정과 함께 짜증난다는 표정이 이리저리 섞이기 시작했다.
“하… 진짜 자기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걸… 미안, 나츠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그래서… 먼저 집에 들어가있을래..? 금방 갈 테니-”
“그게 뭔데…”
“어..? 나츠무, 금방 무슨 말-”
“그게 뭔데… 그게 나보다 더 중요해…?”
처음으로 본 나츠무의 얼굴이다. 분노로 가득찬 말처럼 보였지만 한글자, 한글자 떨림이 가득했다. 표정은 마치 화가 난 것이 아닌 슬픔만이 가득했다. 카무이는 푸르른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상태로 나츠무를 바라 볼 뿐이었다. 나츠무의 저런 반응은 만나고 난 이후 처음 본 반응이기에 카무이의 몸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자신이 지금 나츠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카무이는 굳었던 몸을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며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서있는 나츠무를 안아주었다.
나츠무는 사실 카무이에게 그런 말을 할 의도는 없었다. 카무이가 바쁜 걸 알고있으며, 그 만큼 카무이도 일만 하느라 쉴 수 없었기에 지쳤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카무이와 다르게 자신은 이리 편하게 살고있으니 자신보다 카무이 쪽에서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카무이는 화 따위 내지않고 나츠무를 가만히 안아주기만 했다. 그제서야, 나츠무는 자신이 카무이에게 무슨 말을 꺼냈는지 눈치채버렸다. 카무이에 대한 미안함과 서러움이 섞여들어가 그대로 카무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카무이는 우는 나츠무에게 단 한 마디의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숨만 쉬어보일 뿐이다.
아마 그건 지금 카무이가 나츠무에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일테니깐. 지금은 단지 울고있는 나츠무를 조용히 달래주는 것, 걱정하지말라며 안심 시켜주는 것일뿐. 그렇게 조용하고 희미하게 가로등 불빛만 켜져있는 새벽 길거리에 조용히 울어보린 나츠무는 자신의 기모노 소매를 들춰올려 눈가를 비볐다. 카무이는 다 울고 난 나츠무를 가만히 바라보니 두 달 사이에 밥도 잘 챙겨먹지 않을 걸까나. 두 달 전에 봤던 나츠무의 모습과 확연히 다를 정도로 말라보였다. 카무이는 나츠무 앞에서 전화기를 꺼내 가볍게 타자를 쳐보였고, 문자 발송 버튼을 눌렸다. 그리고는 들고있던 전화기를 주머니 안에 집어 넣더니 나츠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츠무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카무이 옆에 나란히 서서 같이 걸어 갈 뿐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그대로 나츠무를 안아든 채 움직였을텐데, 카무이는 나츠무와 좀 더 오래 천천히 같이 있고싶었던 것일까나. 그렇게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를 이리저리 빙빙 돌아가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손만 잡은 채 어두운 밤 거리 사이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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